赦(ゆる)しという名の暴力
前回の拙稿(関連リンク:『歴史と和解の問題』―ファシストは和解と対象ではなく、断罪の対象―朝鮮・韓国語)に対して、数日前にパク・ユハ教授の反論文(関連リンク:FB記事、朝鮮・韓国語)に接しました。この反論文はパク・ユハ教授が提起された一部の問題―特にパク・ユハ教授の本〈帝国の慰安婦〉と関連した問題―について、私は後に〈帝国の慰安婦〉という本について書評を書くながらより詳細な答弁を差し上げたいと思います。
いまこの場を借りていったん一般論から広げてみたいと思います。つまり、「慰安婦」という問題の本質に対して一度よく考え、パク・ユハ教授が話そうとする「赦しと和解」の裏ではどれだけおぞましい国家主義的、暴力的思考がうごめいているのか見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1.パク・ユハ教授は次のように主張しています。「私が〈国家賠償〉要求が困難だろうという理由は問題がないからではなく『犯罪』として問う『法』自体が近代国家システムには存在しないからです。もちろん、男性中心のシステムであったからです。」
この主張も歴史的事実とは完全に違います。慰安婦問題の本質はなんでしょうか?慰安婦徴発(強制的な徴募)の形態は朝鮮から主に就業詐欺と皇軍を背景とした人身売買である可能性があり、フィリピンあるいは中国のような露骨的な拉致の可能性があり、日本軍占領時期のオランダ領のインドネシアのように各種の圧迫、懐柔そして直接的な強要の組み合わせであるかも知れないですが、その本質は同一です。
即ち、国家(軍隊:国家のひとつの組織体)によって制度化された女性に対する性暴力です。いわゆる国家的な制度化された強姦です。しかし、戦時強姦はすでに17世紀以降の国際法で厳重に禁止されています。
慰安婦問題の研究者でおありのパク・ユハ教授はこの問題を門外漢である私よりよくご存知のはずでしょうが、すでにオランダ国際法創始者ユーゴ・クロティウスは戦時強姦を最悪な戦争犯罪として扱いました。
その次に第1次ジュネーブ協約(1864年)とヘア(ハーグ)協約(1899年)の内容をご覧になれば、そこには“crimes against women’s chastity and honour” (女性の貞節と名誉に対する犯罪)など明示的に出ています。もちろん、その時代の家父長的な言語ではありますが、とにかく近代法体制からみて日本軍の慰安所設置と慰安婦の性奴隷化は明らかに文字そのままに「犯罪」であっています。
オランダが日本が占領したインドネシアをもう一度再占領したときに慰安所の設置に責任のあった日本の将校たちは現地で戦争犯罪人として起訴、裁判をして実刑を与えた前例があります。
問題はこれです。白人女性を性奴隷化させた日本の将校たちはその犯罪の対価として命を差し出さなければならないときもありました。しかし、一方で非白人占領地女性(中国、フィリピン)あるいは非白人植民地女性(朝鮮人)を性奴隷化させた戦犯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
私たちは今、最大限に要求しているのも実際には「責任者の処罰」でもなく「国家特別法制定」、「国家の名においての賠償」、「教育など再発防止」程度ではありませんか?
アウシュビッツで少しだけでも勤務していたナチ戦犯は、どんなに百歳の高齢者になろうとも摘発してすぐにアメリカなど事後的に取得した国籍は無効になり、そのまま裁判所に連れていかれます。原則上戦犯たちに対する時効はありません。原則上。
問題は、非白人女性たちへの戦争犯罪を犯した先進国(?)日本国籍の戦犯たちにこの原則は事実上、適用されない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ほんとうに極悪な世界に生きていませんか?
もちろん批准当時、朝鮮などの植民地を例外に置くという巧妙な但し書きを付けましたが、慰安所は朝鮮/台湾/遼東以南ではない他の場所に位置していた以上、どんな巧妙な但し書きを付けたとしても原則上、批准したくらいの責任を果たすべき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とにかく、誰がみても国際法体制では日本軍の行為は時効のない戦犯行為であるのは間違いありません。ただし、事実上植民地女性に対する戦争犯罪が処罰されていない極度の不平等と違法的な私たちの世界の体制が問題なのです。
この主張は上の話しと照らし合わせたときに大きな問題を抱えています。慰安婦という言葉は日本軍の行為が近代国際法的意味での「国家の戦争犯罪」なら「官民合同の基金」をもってそのどんな「解決」も原則的に不可能であります。
「犯罪」に対する本当の解決方法とは本来なんでしょうか?たとえ犯人が捕まらなかったとしても不在裁判だとしても「判決」が出なければ犯罪が解決するも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慰安婦犯罪の解決だけなぜ違わないといけないでしょうか?これが国家犯罪である限りここでは過去の日本国の犯罪行為に対する今日の日本国首脳および国会などの法的判断がなければいけないし、「官民」の形態ではない国家からの賠償が必要となります。
3.パク・ユハ教授は次のように主張されます。「現代日本で存在するそのような人々との連帯が重要であるなら、非人間的なシステムの中で、それでも人間的に努力した過去の彼らの行為と記憶は無視されなければならない理由はありません。なによりもそのようなことを思い浮かばせるのは、免罪するためではなく、支配と暴力の記憶を浮かんでくる一方で赦しの力を育てるためです。その赦しは日本のためではなく私たち自身のためであります。憎しみというトラウマから解放されるためなのです。」
現在の日本人だろうが韓国人だろうが、一番いいことは犯罪組織である日本/韓国などの「国家」の過去のヤクザ(組織暴力)行為に対する法的で厳重な処理です。なぜならば、そのような処理が一度でもあるならば、次の国家暴力組織(軍隊など)従事者たちを少し行儀よくなってもう一度似たようなことを犯す前に二度ほど考え込むでしょう。
パク・ユハ教授はいったい慰安婦はるもにや私たちすべてに誰を「赦せ」というのでしょうか?個々人としての日本人を?両親のある日本の方がナヌムの家でボランティアしたり、日本で慰安婦問題を本当に解決するめに闘ったりされていることはみなが知っていることであり、慰安婦はるもにたちが個々人の日本人に対して賠償要求をしようとする訳でもないことも周知の事実です。
個々人として日本人および韓国人の間は「赦す/される」ことも別になく、お互いうまく連帯もしていて、両方の国家/企業が喧嘩すればいいだけで、この問題とは関係のないことです。ここで問題の対象は日本国という「国家」でしょう。日本国を赦せというのでしょうか。
日本だろうが韓国だろうが似たような水準の事実上のやくざ組織なのにその組織を「赦し」て、その組織と「和解」するというのはどんな意味を内包しているのか、分かりそうで分からないことです。国家を愛せよというならば明らかに、すでに国家主義という判断になるのに、国家を愛せよと、国家を許せとはそう変わらないものでしょう。
やくざ組織という言葉があまりにも酷すぎると感じるかもしれませんが、大韓民国も日本国もその外部者的な被害者たちに対しての態度をみれば・・・他の表現が見当たりません。大韓民国の場合、その軍人たちが虐殺と強盗、強姦を犯したベトナムの村で建てられた憎悪碑たちを、金をあげるから撤去しろと、現在、密かに要求しているじゃないですか。
金を少しやるからゆるしてくれと和解しろと、ベトナム被害者たちの子孫たちがそんな国家をほんとうにゆるすとお思いでしょうか?日本国が大韓民国と違うところは?お金がより多額で、またアメリカと手を組んで犯した犯罪ではなく、一時的にアメリカと戦って犯した犯罪であるから、大韓民国より言い逃れするのが少し難しいでしょう。アメリカなど交戦した国の世論も注視しなければならないですから。
だから、「金をやるから憎悪碑をなくせ、この東南アジア野郎ども」よりは少し高尚な(?)様相をみせているのでしょう。「基金」をつくり「総理の手紙」のような格式ばったものを用意する振りもしてみて、金もより多額で、個人別に渡して、そして続けて世界体制の周辺部に対する各種の犯罪行為をご飯を食べるかのようにするという次元では・・・私たち大韓民国と日本国はまるで兄弟でしょう。一卵性双生児のような。
やくざ国家日本国をゆるして、という言葉は結局、やくざ国家大韓民国に対するなんらかの「肯定的受容」を意味したりもします。他はわかりませんが、進歩とはとても無関係な話でしょう。
ずっと横暴を続ける強者に「ゆるせ」と弱者に話す以上の暴力があるでしょうか?私がなぜパク・ユハ教授の主張に到底、まったく同意できないのか、パク・ユハ教授はよく理解してくださるよう願います。
지난 번 글(관련 글 링크)에 대해서, 저는 며칠 전에 박유하 교수의 반박글 (관련 글 링크)을 접했습니다.이 반박글에서 박유하 교수가 제기하신 일부 문제 – 특히 박유하 교수의 책 <제국의 위안부>와 관련된 문제 – 에 대해서는, 저는 차후 <제국의 위안부>라는 책에 대한 서평을 쓰면서 차차 보다 상세한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지금 이 자리를 빌어서 일단 일반론부터 펴볼까 합니다. 즉, “위안부”라는 문제의 본질에 대해 한 번 사고해보고, 박유하 교수가 이야기하시는 “용서와 화해”의 이면에 얼마나 끔찍한 국가주의적, 폭력적 사고가 도사리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박유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십니다: “제가 <국가배상>요구가 어렵다고 한 이유는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범죄`로서 물을 ‘법’ 자체가 근대국가시스템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남성중심의 시스템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완전히 다릅니다. 위안부 문제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위안부 징발의 형태는 조선에서처럼 주로 취업사기와 황군을 배경으로 하는 인신매매일 수가 있었으며, 비율빈(필리핀) 내지 중국처럼 노골적 납치일 수 있었으며 일본군 점령 시기 화란국령(네덜란드령) 인도네시아처럼 각종 압박과 회유, 그리고 직접적 강요의 조합일 수도 있었지만, 그 본질은 동일합니다.
바로 국가 (군대: 국가의 하나의 조직체)에 의한 제도화된 여성에 대한 성폭력입니다. 말하자면 국가적인, 제도화된 강간이죠. 그러나 전시 강간은 이미 17세기 이후로는 국제법에서 엄중하게 금지돼 있습니다.
위안부 문제의 연구자이신 박유하 교수는 이 문제의 문외한인 저보다 더 잘 아실 일입니다만, 이미 17세기의 화란국 국제법 창시자인 위고 그로티우스는 전시 강간을 최악의 전쟁범죄로 다루었습니다.
그 다음에 제1차 제네바 협약 (1864년)과 해아 (헤이그) 협약 (1899년)의 내용을 보시면, 거기에서 “crimes against women’s chastity and honour” (여성의 정절과 명예에 대한 범죄) 등은 명시적으로 나옵니다. 물론 그 시대의 가부장적 언어지만, 좌우간 근대 법 체제로 봐서는 일본군의 위안소 설치와 위안부의 성노예화는 분명히 문자 그대로 “범죄” 맞습니다.
화란국이 일본이 점령한 인도네시아를 다시 되찾아 재점령했을 때에 위안소 설치에 책임 있었던 일본 장교들을 현지에서 전쟁범죄로 기소, 재판하여 실형을 준 전례도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것입니다. 백인 여성을 성노예화시킨 일본 장교들은 그 범죄의 대가로 목숨을 내놓아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한데 비백인 점령지 여성 (중국, 비율빈) 내지 비백인 식민지 여성(조선인)을 성노예화시킨 전범들은 어떤가요?
우리는 지금 최대한으로 요구하는 것도 사실 “책임자 처벌”도 아니고 “국가 특별법 제정”, “국가 이름으로의 배상”, “교육 등 재발 방지” 정도이지 않습니까?
아우슈비츠에서 잠깐이나마 근무한 적이 있는 나치 전범은, 아무리 백세의 고령자가 돼도 적발 즉시 미국 등 사후적으로 취득한 미국 등의 국적이 취소되고 바로 재판소에 끌려갑니다. 원칙상 전범들에 대한 공소시효는 없습니다. 원칙상.
문제는, 비백인 여성들에게 전쟁범죄를 저지른 선진국(?) 일본 국적의 전범들에게 이 원칙은 사실상 적용되어지지 않는다는 거죠. 우리는 참 나쁜 세계에서 살지 않습니까?
참고로, 조선 여성 위안부의 징발이 주로 인신매매 형태이었다면, 일본은 국제 여성 인신매매 방지 조약(관련 글 링크)에 사인한 만큼, 알고서 범죄를 저질렀다고 봐야 합니다.
물론 비준 당시 조선 등 식민지를 예외로 두는 교묘한 단서를 달았지만, 위안소는 조선/대만/요동 이남이 아닌 다른 곳에서 위치한 이상, 아무리 교묘한 단서를 달았다고 해도 원칙상 비준을 한 만큼 책임도 져야 하지 않았을까요?
좌우간, 누가 어떻게 봐도 국제법 체제로는 일군의 행위는 공소시효가 없는 전범행위에 해당되는 건 맞습니다. 단, 사실상으로 식민지 여성에 대한 전쟁범죄가 처벌되어지지 않는, 극도로 불평등하고 위법적인 우리 세계 체제가 문제입니다.
2. 박유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십니다: “일본이 피해자의 요구를 거절했다고 하셨는데, 아시아여성기금은 국가적 보상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보상이었다고 많은 페이지를 할애해서 썼습니다. 기금에 담긴 일본정부와 ‘보통 일본인’의 마음과, 그 보상을 받은 60분의 할머니들의 선택이 무시되어야 하는 이유를 설명 부탁드립니다.”
이 주장은 위에서 이야기한 부분으로 비추어봤을 때에 커다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위안부라는 이름의 일군의 행각이 근대 국제법적 의미의 “국가의 전쟁범죄”라면 “관민 합동의 기금”을 가지고 그 어떤 “해결”도 원칙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범죄”에 대한 진정한 해결방법은 본래 뭘까요? 비록 범인이 잡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부재재판이라도 해서 “판결”이 나와야 범죄가 해결되는 건 아닙니까? 위안부 범죄는 과연 왜 달라야 할까요? 단 국가범죄인 만큼, 여기에서는 과거 일본국의 범죄 행각에 대한 오늘날 일본국 수반 및 국회 등의 법적 판단이 있어야 될 것이고, “관민” 형태가 아닌 국가로부터의 배상이 필요합니다.
국가범죄에 대한 제대로 된 처리를 하지 않는 것은, 결국 미래의 국가범죄가 또 저질러질 토양을 만들어내는 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시아여성기금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으신 분들의 선택이야 당연히 존중돼야 하지만, 어려운 조건에 처해진 개개인의 선택은 개개인의 선택이고, 국가가 해결해야 할 문제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3. 박유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주장하십니다: “현대 일본에 존재하는 그런 이들과의 연대가 중요하다면 비인간적인 시스템속에서 그나마 인간적이려 노력했던 과거의 그들의 행위와 기억이 무시되어야 할 이유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그런 일들을 떠올리는 것은 면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배와 폭력의 기억을 떠올리는 한편으로 용서하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입니다. 그 용서는 일본을 위해서가 아니라 저희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미움이라는 트라우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지요.”
현재의 일본인이든 한국인이든, 가장 득을 볼 것은 범죄조직인 일본/한국 등 “국가”의 과거 깡패행각에 대한 법적인 엄중한 처리입니다. 왜냐하면, 한 번 그런 처리가 있은 다음에 국가 폭력 조직 (군대 등) 종사자들이 약간 버릇이 좋아져 다시 한 번 비슷한 류의 짓을 저지르기 전에 두 번 생각해본단 말입니다.
현재 살고 있는 일본인에게도 한국인에게도 최악의 적은 바로 일본/한국 국가인 만큼 국가에 너그럽다는 것은 그 인민에 대한 가혹성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드디어 “핵심 문제”로 도달했습니다.
박유하 교수는 도대체 위안부 할머니나 우리 모두에게 누굴 “용서”하라 하십니까? 개개인으로서의 일본인을? 양심 있는 일본 분들이 나눔의 집에서 봉사하시기도 하고 일본에서 위안부 문제의 진정한 해결을 위해 싸우기도 하고 하시는 것은 다들 아는 일이고, 위안부 할머니 분들은 개개인의 일본인에 대한 배상요구를 하시는 게 아니라는 점도 주지의 사실입니다.
개개인으로서의 일본인 및 한국인 사이는 “용서”할 일도 따로 없고, 서로 연대를 잘해서 양쪽 국가/기업과 싸우면 될 일이고, 이 문제와 관계 없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문제의 대상은 일본국이라는 “국가”죠. 일본국을 용서하라는 것입니까?
일본국이든 대한민국이든 비슷한 수준의 사실상의 깡패조직인데 그 조직을 “용서”하고, 그 조직과 “화해”한다는 건 도저히 무슨 의미를 내포하는지, 알다가 모를 일입니다. 국가를 사랑하라 하면 분명히 당장에 국가주의로 판단이 나올 터인데, 국가를 사랑하라는 말이나 국가를 용서하라는 말이나, 과연 그렇게 다른가요?
깡패조직이란 말이 지나치게 심한 걸로 느껴질 수 있지만, 대한민국도 일본국도 그 외부자적 피해자들에 대해 취해온 태도를 보면…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같으면, 그 군인들이 학살과 강도짓, 강간을 저지른 월남의 마을에서 지어진 증오비들을, 돈을 주면서 철거하라고 지금 은근히 요구하잖아요.
돈을 조금 줄테니까 용서를 하고 화해하라고. 월남 피해자들의 후손들이 그런 국가를 정말 용서할 일은 있을 것 같습니까? 일본국이 대한민국과 다른 점은? 돈은 훨씬 더 많고, 또 미국과 손잡아 저지른 범죄가 아니고 일시적으로 미국과 싸우면서 저지른 범죄이기 때문에 대한민국보다 발뺌하기가 조금 힘듭니다. 미국 등 상전 나라 여론도 주시해야 하고 해서요.
그러니까 “돈을 줄테니 증오비를 없애라, 이 동남아 새끼들아”보다 약간 고상한(?) 모양을 취해보는 거죠. “기금” 만들고 “총리 편지”와 같은 격식을 차리는 척도 해보고, 돈도 보다 많이, 개인별로 주고…그러나 범죄를 범죄라고 부르지 않고 책임자 처벌 등을 아예 외면하고 국가적인 법적 해결을 회피하고, 그리고 계속해서 세계체제 주변부에 대한 각종 범죄행각을 밥 먹듯이 하는 차원에서는…우리 대한민국과 일본국은 호형호제죠. 일란성쌍둥이.
깡패국가 일본국을 용서하라는 말은 결국 깡패국가 대한민국에 대한 어떤 “긍정적 수용”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른 걸 몰라도 진보와는 아주 무관한 이야기죠.
계속 횡포를 부리고 있는 강자를 “용서”하라고 약자에게 이야기하는 이상의 폭력이 있을까요? 제가 왜 박유하 교수의 주장에 도저히 전혀 동의할 수 없는지 박유하 교수님께서 잘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出典
http://www.redian.org/archive/71889